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많이 알려진 책이다.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하루 두끼도 간간히 침대도 없는
평바닥에서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노역과 구타를 당하면서도 삶에 대한 기대를 해볼수 있을까?
내가 그러한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저자는 아주 좁은 공간에서 물론 주변이 무덤이었지만 자신을 관조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작은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삶의 희망은 주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가끔 내 삶이 어렵고 힘들때 이 책을 한번 보라. 난 이 저자에 비하면 쉽게 풀어 나갈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본문요약]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이 사람이 되는 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엉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 하는게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획를 주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수 있는 기회를 준다.
왜 살아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수 있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것도 아마 시련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수 있는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치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믈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삶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 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수 있는 방법은 없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말해 인간을 삶으로 부터 질문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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